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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줄거리, 인물분석, 미장센, 시사점)

무비토커 2026. 7. 13. 16:30

목차


    걸어도 걸어도 출처:IMDb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가장 깊은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사실, 알면서도 우리는 매년 그 집으로 돌아갑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08년작 <걸어도 걸어도>를 처음 봤을 때, 저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오래된 주택 한 채, 여름 하루, 그것만으로 이렇게 많은 것을 꺼내놓는 영화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1. 줄거리 : 기일(忌日)이라는 이름의 반복되는 의식

    영화는 매년 여름, 장남 준페이의 기일에 맞춰 시골 부모님 댁으로 모이는 가족의 1박 2일을 따라갑니다. 준페이는 15년 전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고 목숨을 잃은 인물입니다. 집안의 자랑이자 기둥이었던 그의 빈자리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이 집구석구석에 짙게 남아 있습니다.

    차남 료타는 재혼한 아내 유카리와 그녀의 아들 아츠시를 데리고 이 불편한 모임에 참석합니다.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운 가족 행사처럼 보이지만, 밥상 위에서 오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묵은 감정이 배어 있습니다. 저도 명절 때 고향 집에 가면 딱 이런 공기를 느끼곤 했는데, 영화가 그 감각을 너무 정확하게 재현하고 있어서 오히려 불편할 정도였습니다.

    이야기의 핵심 전환점은 준페이가 목숨 걸어 살려낸 소년 요시오의 방문입니다. 이제는 뚱뚱하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청년이 된 그가 매년 죄인처럼 찾아와 고개를 숙이는 장면에서, 어머니 토시코는 충격적인 고백을 합니다. "그 아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라는 말. 이 한 문장으로 영화는 단순한 가족 드라마의 궤도를 완전히 벗어납니다.

    결말은 극적인 화해도, 폭발적인 갈등도 아닙니다. 가족들은 다시 미소를 짓고 음식을 나누며 흩어집니다. 그리고 료타는 뒤늦게 깨닫습니다. 아버지와 축구를 보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부모님은 그 전에 세상을 떠납니다. 영화는 그 '한 발짝 늦음'을 아무런 드라마 없이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요약: 장남의 기일을 매년 반복하는 가족의 하루, 그 안에 쌓인 상실과 원망을 극적 과장 없이 담아낸 것이 이 영화의 출발점입니다.

     

    2. 인물분석 :  결핍과 집착이 빚어낸 두 개의 초상

    차남 료타를 연기한 아베 히로시는 이 영화에서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무표정한 얼굴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합니다. 료타의 핵심 갈등은 정체성 혼란(identity crisis), 즉 평생을 '형의 대역'이라는 역할에 갇혀 자기 자신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서 정체성 혼란이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속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규정하지 못한 채 타인의 기대 속에서 표류하는 심리 상태를 뜻합니다.

    전직 의사인 아버지는 장남이 병원을 이어받길 바랐고, 미술품 복원사가 된 료타를 은근히 무시합니다. 料타는 부모님 댁에 있는 내내 방어적 태도를 취하고,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한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제가 이 장면들을 보면서 가장 아팠던 건, 그가 부모님 앞에서 절대 먼저 다가가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다가가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포기처럼 보였습니다.

    반면 어머니 토시코를 연기한 키키 키린은 이 영화 최고의 존재감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따뜻한 음식을 준비하고 웃음을 잃지 않지만, 대사 곳곳에서 날카로운 가시가 드러납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애도 반응(grief response) — 상실 이후 슬픔이 분노나 집착으로 전환되는 심리 과정 — 을 토시코는 요시오를 향한 잔인한 감정으로 표현합니다. 이 캐릭터를 미워하기도, 완전히 이해하기도 어렵다는 점이 영화를 내내 팽팽하게 유지시키는 힘입니다.

    • 료타: 형의 그늘에 눌려 평생 인정받지 못한 차남, 체념과 방어가 뒤섞인 인물
    • 토시코: 장남을 박제하듯 기억 속에 붙들어두는 어머니, 인자함과 잔혹함이 공존
    • 쿄헤이(아버지): 가부장적 권위를 내려놓지 못한 채 가족 안에서 겉도는 고독한 노인
    요약: 각 인물은 단순한 선악 구도 없이, 결핍과 집착과 고독이 뒤섞인 실제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3. 미장센 : 일상의 소음이 감정을 말하는 방식

    고레에다 감독의 연출 방식을 처음 접하는 분이라면, 이 영화가 처음에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저도 솔직히 처음 30분은 '이게 뭔가 일어나긴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정적인 흐름이 쌓이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영화의 미장센(mise-en-scène)은 이 작품의 핵심 언어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배우의 위치, 소품, 조명, 색채)를 통해 의미를 만드는 영화 연출 기법을 말합니다. <걸어도 걸어도>에서는 낡은 일본식 가옥의 좁은 주방, 옥수수튀김을 만드는 소리, 마당에 날아든 노란 나비 한 마리가 모두 그 자체로 하나의 대사가 됩니다. 특히 노란 나비는 준페이의 영혼을 암시하는 장치로 읽히는데, 이걸 대놓고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주방에서 어머니와 딸이 요리하며 나누는 대화 시퀀스는 카메라를 거의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신 두 인물의 시선과 동선, 말과 침묵의 배치만으로 팽팽한 감정의 대립을 담아냅니다. 여기에 기타 듀오 곤티티(Gontiti)의 아코디언과 기타 선율이 흐르는데, 이 서정적인 사운드가 비극적 서사 위에 얹히면서 오히려 더 서늘한 쓸쓸함을 만들어냅니다. 슬픔을 슬프게 연출하지 않는 것, 그게 이 감독의 방식입니다.

    <남매의 여름밤>(2019, 윤단비 감독)을 먼저 본 덕분에 저는 이 영화의 공기에 더 빨리 익숙해질 수 있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여름날 한집에 모인 가족의 일상을 담지만, <걸어도 걸어도>는 매년 되풀이되는 기일이라는 구조 위에 훨씬 더 무거운 시간의 무게를 얹습니다.

    요약: 극적 사건 없이 공간과 소리와 시선만으로 감정을 말하는 연출, 그것이 이 영화 미장센의 핵심입니다.

     

    4. 시사점 : "한 발짝 늦는" 우리에게 건네는 말

    영화의 제목 '걸어도 걸어도(歩いても 歩いても)'는 아무리 걸어도 도달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암시합니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어머니를 잃은 직후 만들어졌다고 밝혔습니다. 그 개인적 상실이 영화 전체에 배어 있고, 그래서인지 인물들이 겪는 '늦음'은 단순한 서사 장치가 아니라 실제 삶의 무게처럼 느껴집니다.

    료타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노래 제목을 뒤늦게 기억해냅니다. 아버지와 축구를 보러 가자는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습니다. 영화는 이 '한 발짝 늦음'을 교훈처럼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냥 일어난 일처럼 기록하고 끝납니다. 그게 더 뼈아픕니다.

    가족 내 세대 간 소통 단절은 한국 사회에서도 오랫동안 지적된 문제입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성인 자녀와 부모가 정서적으로 긴밀하게 소통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전체의 절반을 넘지 않습니다(출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이 영화가 일본 가족의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또한 영화가 다루는 애도(mourning)의 방식은 주목할 만합니다. 애도란 상실한 대상을 심리적으로 내면화하고 현실에 적응해 가는 과정을 말하는데, 토시코와 쿄헤이 부부는 15년이 지나도록 이 과정을 완수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요시오를 매년 불러 죄책감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슬픔을 유지합니다.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이처럼 상실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상태를 복합 애도(complicated grief)라고 부르며, 이것이 남은 가족 관계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합니다(출처: WHO 정신건강 팩트시트).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머문 질문은 이겁니다. 나는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한 발짝 늦기 전에' 다가가고 있는가.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요약: 가족이라는 관계 안의 소통 단절과 애도의 실패, 이 영화는 그것을 교훈이 아닌 삶의 기록으로 남깁니다.

     

    5. 자주 묻는 질문

    Q. 걸어도 걸어도, 재미있는 영화인가요? 너무 지루하지 않나요?

    A. 솔직히 말하면, 빠른 전개나 반전을 기대하고 보면 초반 30분은 답답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일상의 시간감을 그대로 따라가는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다만 가족 관계나 세대 간 소통에 개인적인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어느 순간부터 화면에서 눈을 떼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느리게 시작하는 영화를 즐길 수 있다면 충분히 몰입할 수 있습니다.

     

    Q. 키키 키린이 연기한 어머니 캐릭터, 악인인가요?

    A. 단순히 악인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장남을 잃은 상실의 고통이 복합 애도의 형태로 굳어지면서 주변에 상처를 주는 인물이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사랑과 슬픔이 있습니다. 키키 키린의 연기가 뛰어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데, 관객이 그녀를 미워하다가도 동정하게 되는 순간이 반복됩니다. 이 불편한 양가감정이 영화의 진짜 힘입니다.

     

    Q.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다른 영화도 비슷한 분위기인가요?

    A. 전반적으로 일상의 디테일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극적 과장 없이 가족과 관계의 균열을 그린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무도 모른다>, <태풍이 지나가고>, <어느 가족>이 비슷한 결의 영화입니다. 다만 <걸어도 걸어도>는 그 중에서도 가장 '조용하고 조밀한' 작품이라는 평이 많습니다.

     

    Q. 영화 속 노란 나비는 무슨 의미인가요?

    A. 영화는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마당에 날아드는 노란 나비는 세상을 떠난 장남 준페이의 영혼을 암시하는 상징으로 널리 해석됩니다. 어머니가 나비를 보며 "또 왔네"라고 말하는 장면은, 15년이 지나도록 아들을 보내지 못한 그녀의 심리 상태를 단 한 마디로 압축해 보여주는 명장면입니다.

     

    6. 결론

    <걸어도 걸어도>는 가족을 이상화하거나 비극적으로 과장하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놓아두고, 관객 스스로 느끼도록 내버려 둡니다. 그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랫동안 무언가가 남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직접 여러 번 돌려봤는데, 볼 때마다 눈에 띄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엔 어머니가 보이고, 다음엔 료타가 보이고, 그다음엔 아버지의 고독이 보였습니다.

    가족 관계에서 묵은 감정이 쌓여 있는 분, 또는 '그때 그 말을 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를 안고 사는 분이라면 이 영화를 권합니다. 다음으로 뭘 할지에 대해서도 한 마디 드리자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오래 연락하지 못한 가족에게 짧게라도 연락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한 발짝 늦기 전에.

     

     

    참고: https://namu.wiki/w/%EA%B1%B8%EC%96%B4%EB%8F%84%20%EA%B1%B8%EC%96%B4%EB%8F%84